키리안 대장정을 마치고
키리안 대장정은 다른 성약의 단에 비해서 어려운 편이다. 인던도 가야 하고, 베나리 평판도 약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것은 플레이가 아니다. 스토리다. 다른 성약의 단도 그렇지만, 이야기가 치밀하게, 승천의 보루와 연결되어 있다. 키리안 대장정은 승천의 보루의 전체 퀘스트와 일퀘와의 연관성이 가장 높은 대장정이었다.
어둠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영역, 렐름이며, 가장 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지한 내용도 많고, 어려운 내용도 많다. 키리안 인도자가 계속해서 영혼을 데려오는 이유에서 많이 이야기가 되고 있다. 또 키레스티아가 무능한가?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다. 아무래도 세계관의 이해는 무력의 우위로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 많은 글이 키리안이 무능하다로 가득하다. 하지만 실제 텍스트는 많이 다르다.
키리안의 대장정을 보면, 어둠땅이 전혀 다른 세상이고, 과거의 삶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더 나은 형태로 나아가기 위한 관점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이전 세계의 삶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열망자들은 고민하고 번뇌한다. 중요한 점은 키리안이 되는 영혼들은 모두 숭고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간 후, 삶을 돌아보는데, 거기에는 과거의 관계의 번뇌가 있고, 고통이 있다. 가족과 친구를 잊는 것은 단순한 망각을 넘어서 자신의 일부가 죽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키리안은 과거를 잊는 절차적인 과정을 진행하고, 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승천자가 되고, 거부한 사람은 이탈자가 된다. 퀘스트를 진행하면, 이탈자가 굉장히 많고, 이들은 보루의 벌판을 헤메는 방랑자가 된다. 이들을 규합한 것이 데보스다. 이탈자가 가진 '길'에 대한 의심은 들불처럼 번져서 키리안의 체계가 붕괴할 지경에 이르른다. 하지만, 이들은 훈련된 자들이고, 자신들의 길을 지키기로 한다.
많은 플레이어가 여기서 걸린다. 왜? 게시판에서 본 많은 플레이어가 이 부분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데 퀘스트 라인으로 깊게 들어가면, 이들이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을 희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어둠땅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키리안 전체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길인 것이다. 스스로를 복수와 의심에서 구하기 위한 방법이 키리안의 길인 것이다.
여기에 반론을 하는 플레이어는 지금의 상황을 문제 삼는다. 키리안이 무슨 짓을 해도, 영혼들은 나락으로 흘러들어간다. 구원이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 숨어있는 오류는 키리안이 영혼을 수호하고, 가르치는 일이 오리보스에서 일어난 일과 전혀 다른 사건이라는 것이다. 오리보스의 일은 심판관의 문제이다. 그리고 키리안은 심판관이 되지 않기 위한 훈련을 한다. 키리안이 영혼을 데려오고, 심판하고, 갈 곳을 정하게 되면, 키리안이 어둠땅에서 가장 권력이 된다. 어둠땅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 키리안은 쉽게 연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정하지 않기 위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기억을 없앤다. 입법과 기소, 재판이 분리되어 있는 사법제도와 비슷하다. 경찰관이 불쌍하다고 범인을 놓아주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재판에서 죄가 가볍게 평가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키리안이 각각 하는 행동과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일일 퀘스트와 대장정을 비롯하여 각각의 텍스트를 어느 정도 찾아보면, 키리안을 포함한 어둠땅의 성약의 단은 모두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탈자들은 과거가 자신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고, 승천자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 과거를 극복하며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탈자는 이 과정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이걸 막으려고 한다. 전체 퀘스트 라인에서 알 수 없고, 키리안 대장정에서만 알 수 있는 점은 과거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탈자는 이미 죽은 사람인데,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세상의 기억에 집착하게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 두 개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장막으로 분리되어 있다. 결국 이 집착은 이탈자가 과거를 지키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과거를 잊게 하는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키레스티아와 승천의 보루, 승천의 길을 파괴하려는 이탈자의 시도는 승천의 보루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둠땅의 모든 영역은 연결되어 있고, 자신의 위해 내린 결정이 어둠땅 전체를 파괴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게 되는 성향으로 흘러가면서 과거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본인을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승천의 길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을 간과하는데, 이 부분의 스토리 난이도는 높은 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서 배치된 갈등도 많으며, 와우의 지난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이탈자의 이야기는 실바나스의 최근 행보와 관련되어 있다. 피상적인 선과 악을 넘어서 실바나스는 과거에 복잡하게 얽혀 있고, 실바나스의 과거는 모든 일이 실패로 얼룩져 있다. 최근 실바나스는 얼라이언스를 부정하는 것에도 실패하고, 그들의 가치를 꺽는 것에도 실패했다. 마지막에는 호드의 가치에 의해서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호드마저 부정했다. 그리고 이탈자처럼 이 세계의 규칙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말하는 간수, 나락의 힘과 함께 하고 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채로 과거의 고통은 점점 실바나스를 압박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승천의 보루를 여행하고, 키리안과 함께 하면서, 실바나스를 떠올리는 경험을 하고, 실바나스의 행동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실바나스 내린 결정이 가진 윤리적인 약점을 분명하게 한다.
실바나스는 자신만의 대의를 따르고 있다. 처음엔 복수에 집착했다. 그러나 아서스에 대한 복수가 흐지부지 된 후에는 포세이큰의 존재에 집착했다. 그러나 그 집착은 포세이큰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실바나스의 집착은 어둠으로부터 종족을 구한다는 대의를 품고 있지만, 대의가 큰 저항에 부딪칠 때마다 더 삐뚤어졌다. 가로쉬처럼 샤의 힘에 휘둘리지는 않지만, 샤의 힘을 얻는 과정이 가로쉬의 영혼이 점점 더 비틀렸던 과정과 비슷하다. 가로쉬도 호드의 생존에 집착했고, 호드를 통제하려고 했고, 결국 지독한 독선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모두 스랄에게 돌렸다. 하지만 실바나스는 그 책임을 돌릴 존재가 없었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미 아서스나 다름 없는 존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나락과 간수, 안두인을 통해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안두인을 통해서 승천의 보루에 침입하여, 키레스티아의 열쇠를 탈취하는 간수의 계획은 간수가 단순히 군사력을 키우는 군인같은 모습에서 매우 전략적인 입장을 취하는 간수의 간교함을 보여준다. 간수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도구로 사용한다. 이탈자의 이야기는 어둠땅의 질서를 이해하기 과정과 그 질서가 간수와 다른 무궁한 자들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간수와 나락에 접근한 자들, 리소니아 같은 자는 한 때 고결한 목적을 추구했으나, 결국 다른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여기엔 배신조차 없다. 그저 소모하기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면이 나락과 간수의 잔인함을 이해하게 한다.
'지배의 사슬'에서 실바나스는 간수의 그릇이 되어 있는 안두인을 본다. 이탈자가 보루를 파괴하는 이야기에서 간수는 없다. 키리안 대장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키리안이 내전과 무력으로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는 것이다. 간수는 키리안의 본질을 알고 있었고, 안두인을 보낸다. 안두인의 고결한 영혼은 쉽게 키레스티아를 알현하고, 이탈자의 대규모 반란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다. 그녀의 열쇠를 얻어낸 것이다. 간수의 군대보다 강하다. 그리고 거리낌이 없다. 이 부분이 현대적인 악이 가진 본질을 보여준다. 모든 질서와 시스템을 붕괴시킨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 말이다. 그것은 광기도 아니고, 분노다 아니다. 그저 차가운 전략, 이성이다.
어둠땅에서 블리자드의 스토리가 뛰어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첫 지역의 스토리를 따라가고, 그 지역 세력의 이야기에 집중하면, 그 이야기가 첫 번째 단위의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처음 기억한 장소와 이야기만 기억해도, 다음 패치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핵심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간수는 여전히 위협적이고, 플레이어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는 부분 말이다.